한국고전명화

작가 : 강세황(姜世晃). 제목 : 영통동구(靈通洞口) 외

산곡 2023. 11. 20. 07:04

작가 : 강세황(姜世晃)

아호 : 표암(豹菴)

제목 : 영통동구(靈通洞口)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32.8 x 54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강세황은 사림(士林) 출신의 서화가로서.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菴)이다. 그가 개성(開城) 일대의 명승을 여행하면서. 담은 송도기행첩(松島紀行帖)은 17면으로 꾸며진 하경(夏景)들로. 그중 하나인 이 영통동구는. 바윗더미의 입체 표면에. 대담하게 준법(皴法)에서 벗어나서. 채색의 농담(濃淡)으로 훈염(薰染) 함으로서. 그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입체묘사는. 당시의 한양 화단에서는 획기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미불(米巿). 예운림(掜雲林)을 비롯한 중국 송(宋). 원(元). 명대(明代)의. 명가(名家)들 작품을 방작(倣作)한 것이 많고. 특히 명대 절파(浙派). 오파계(吳派系)의 각체(各體) 그림을 익혔으며. 당시 한양 화단에서 자리잡히기 시작했던. 북종화(北宗畵)와 절충된 남종화(南宗畵)의 정착과. 그 국풍화(國風化)에 보이지 않는 키를 잡았던 작가였다.

 

작가 : 강세황(姜世晃)

아호 : 표암(豹菴)

제목 : 백석담(白石潭)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32.8 x 54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앞의 영통동구(靈通洞口) 와 같이 松島紀行帖에 실려 있는데. 백석담 은 17면 중 세 번째 게재되어 있다. 비 갠 뒤의 투명해진 공기를 통해서 바라다본. 백석담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화면에 옮겼음을. 제발(題跋)에 의해서 확인된다. 송도기행첩은 강세황의 실경산수도 중에서 대표작에 속하는 화첩인데. 이화첩 가운데서도 백석담 은 영통동구(靈通洞口). 청석담(淸石潭)과 더불어 백미로 손꼽히는 수작(秀作)이다. 정선(鄭敾)과 같은 넓은 시야의 대경(大景)을 화면에 압축하는 점에선 뒤지나. 시야가 좁은 대신 대상을 집중적으로 나타낸. 화면구상이나 과감한 생략은. 오히려 그보다 진일보한 점도 없지 않다. 강세황의 실경 산수는 정선의 영향이 역력함을 부인할수 없으나. 그 나름대로 분명한 개성을 갖추고 잇다. 수묵 위주로 원근에 따라 농담의 구별이 분명한 묵선. 그 위에 담록과 담청색이 가채되어 밝고 담백한 화면. 나타내고자 하는 목표에 있어 중요부분의 과감한 선택과 생략의 겸비. 산세나 바위 처리에 있어 선염(선염)에 의한 색의 농도차가 보여주는 입체감 등을 특징으로 열거 될 수 있다.

 

 

작가 : 강세황(姜世晃)

아호 : 표암(豹菴)

제목 : 연강제색도(烟江霽色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36 x 73.7 cm

소장 : 도오교 국립박물관

 

해설 : 화면 전체가 우선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의 넓은 강을 중심하여 대각선으로 분리되고. 전경 왼쪽에 강안(江岸)이 있어. 미법수림(米法樹林) 속에 기와집 누각이 보인다. 강 건너 오른편으로 좀 치우쳐. 여름비가 그친뒤 안개 자욱한 가운데. 발묵(潑墨)으로 묘사된 산봉우리들이 연이어 솟아오르고. 더멀리 원산의 푸른 봉우리와 산등성이가 아득하게 나타난다. 강 건너 안개짙은 숲속에. 담묵으로 처리한 어촌이 흐릿하니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앞에 짙은 먹으로 다리를 하나 걸쳤는데. 수면에 거꾸로 비친다. 널찍한 강심(江心) 에는 고깃배 하나. 애써 삿대질하는 어부가 강을 건넌다. 강 이쪽에 농묵으로 큼직한 미점(米點) 을 찍어 윤기나는 숲으로 가느다란 길이 나있어 누각으로 이어진다. 화면 왼쪽 위 공간에 표암(豹菴) 이라 쓰고. 그 아래 광지(光之) 라고 새긴 주문인(朱文印) 하나가. 고깃배와 대칭을 이루면서 그림에 산뜻한 생기를 북돋게 하고 있다.

 

작가 : 강세황(姜世晃)

아호 : 표암(豹菴)

제목 : 벽오청서도(碧梧淸署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30.1 x 35.8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강세황의 작품에는 중국 명가(名家) 들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 많고. 그는 특히 명대의 절파(浙派). 오파계(吳派系) 의 화법을 몸에 익혀. 당시 한양의 화단에 대두하기 시작한 북종화(北宗畵) 와 절충된. 남종화(南宗畵)의 정착이나 그 국풍화(國風化)에 보이지 않는 기수가 된 화가이다. 강세황은 숙종 때에 예조판서를 지냈던 가현(珂鋧)의 아들로 61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와 영릉참봉(英陵參奉)을 거쳐 한성판윤(漢城判尹) 등의 중요 직책을 지내는 동안. 예술을 통해서 정조(正祖)의 각별한 지우(知遇)로 지내기도 했다. 이 벽오청서도 는 강세황의 많은 중국적 모방작품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이다. 심석전(沈石田)의 그림을 모방하여. 오히려 그 이상의 원숙함과 청정한 담채의 효과를 올리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한국 회화에 공통된 색감의 세계이기도 하다.